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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숲 속의 두 갈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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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7.06.12 조회8,2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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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는 모습, 참 덧없습니다. 이로운 일이 생기면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고, 큰 손해를 보면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니 좋아도 좋은 게 아니고 괴로워도 괴로운 게 아닙니다.


 그뿐입니까? 나는 선의를 가지고 잘해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비난하거나 오해를 합니다. 그럴 때는 걷잡을 수 없이 인간적인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하지만 빤한 거짓말이라도 “당신이 최고야!”라는 칭찬을 들으면 “아닙니다, 제가 뭘…”이라고 답하면서도 은근히 뿌듯해집니다.

 

 그러다 다시 비난의 말이 들리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듭니다. 괴로우면 두 번 다시 내 힘으로 버틸 수 없을 것처럼 힘들어하고, 조금 즐거운 일이 벌어지면 ‘감사해요’라며 막연히 누군가에게라도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집니다.


 단 하루라도 담담하게 살도록 세상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아니, 세상은 그저 제 물길대로 흘러가는데 내가 그에 좋네, 싫네, 행복하네, 불행하네… 하며 온갖 감정의 수채화를 그려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는 이런 감정의 상태를 세속의 여덟 가지 바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이 바람을 맞으며 살아갑니다. 좋으면 기분 좋아서 선업을 짓고, 기분 나쁘면 제 무덤을 파는 줄 알면서도 악업을 짓습니다. 업을 짓는 사람은 그 업에 따른 과보를 받고 또다시 즐겁고 괴로운 상태에 휘말리다가 그에 또 새로운 선업이나 악업을 짓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육신이 허물어져 버리면 둔기를 얻어맞은 도살장의 소처럼 그냥 쓰러져버리고 맙니다.


그렇지요?  우리 사는 모습이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 있지 않지요?


 그러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하면 새삼 인생이란 것을 돌이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면서 서둘러 죽음의 그늘을 털어버립니다. 또는 “그래,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뭘 더 바래? 그냥 사는 동안 착한 일이나 하고 남한테 피해 안 주고 한 세상 살다 가면 그만이지.”라며 죽음 저 뒤편의 일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기도 합니다.

 

 

 

스님들은 왜 출가할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구니스님들만 있는 곳에서 종일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내 몇 분의 스님들과 친해지면서 슬슬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저 스님은 무슨 사연이 있어서 출가하셨을까?’


 특히나 여성일 경우, 세속의 그 화려한 삶을 접고 밋밋한 잿빛 승복만 입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내고서 삭발한 채로 평생을 살기로 결심하였으니 무슨 말 못할 ‘에피소드’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어째 뒤를 캐고 싶기도 한 고약한 호기심입니다.


 애써 궁금증을 누르며 지내다가 스님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자 스님들에게서 출가동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외였습니다. 재가자들이 상상하는 그런 드라마틱한 이유로 출가한 스님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난 스님들은 대체로 10대 후반 시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였던 것이 출가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친구와 선후배들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나자 그것을 보고는 출가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노란 숲속의 두 갈래 길


 미국의 시인인 로버트 프로스트(1974~1963)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시를 아시지요?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갔다가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시인은 두 갈래 길 중에서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일단 시선이 닿는 끝까지 멀리 내다봅니다. 그리고 사람의 자취가 덜한 길을 택하여 걸어갑니다.


 쉬지 않고 불어대는 세상의 저 바람에 휩쓸려 살아가다가 예기치 않게 파국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두 갈래 길 중 어느 한 곳을 선택합니다.


 사람은 그러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가? 그런 비극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비극을 피하거나 두 번 다시 맞이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런 질문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는 길이 하나입니다.


  또 다른 한 길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태어났으니 죽는 것이야 당연지사, 그냥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다가려고 하니 괜히 머리 아픈 고민은 하지 말자’며 느긋하게 삶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 두 갈래 길 중에 전자에 해당합니다. 그저 이 한 세상 마음 편히 화내지 않고 살다가게 해주는 가르침이 아니라 왜 생명은 끝을 맞는지, 그 끝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 끝이 당연한 일이라면 왜 기쁘게 그 끝을 맞이하지 못하고 울며불며 괴로워하다가 제 의사에 반해서 끌려가는지… 이런 것에 대한 대답을 안겨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아니, 그 대답을 찾아 나서도록 촉구하고 대답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포기하고 세속에 묻혀 지내는 삶의 방식을 걸어가는 반면, 수행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을 선택하여 그 길을 걸어간 시인처럼, 외롭고 고되고 힘든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업’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을 잘 살아가도록 그 방법을 일러주는  세간법문이라면, 그 후에 등장하는 교리들은 선업이건 악업이건 업을 짓는 사람들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좀 더 완벽한 행복을 안겨주려는 장치입니다. 즉 출세간법문입니다.


 여러분 앞에 노란 숲 속의 두 갈래 길이 놓였습니다. 단, 시인의 노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나 세간법문의 길을 걸어가다가 한 부류의 사람은 거기서 그냥 파국을 맞이하는가 하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세간법문에 머무는 길과 출세간법문으로 더 나아가는 길. 머무르겠습니까, 더 나아가겠습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이 글은 월간 불광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미령 선생님은 불광불교대학에서 강의 중이시고, 최근에 그리운 아버지의 술냄새라는 책을 불광출판사에서 발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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