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스님을 찾아서 - 2. 지현스님 > 불광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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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스님을 찾아서 - 2. 지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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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7.11.12 조회10,7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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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포곡읍으로 들어서면 우뚝 솟은 아파트가 도드라져 보이고 그 옆으로 반짝이는 나지막한 상가들이 줄지어 서있다. 한 상가의 골목으로 들어서면 산길로 쭉 뻗은 도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10여분 정도 더 들어가자 산 중턱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금화선원이 나왔다.

 

 


금화선원의 규모만으로 볼 것 같으면 여느 큰 사찰이 부럽지 않은 것 같은데 건물들이 낡고 허름해서 새로 불사한 아담한 대웅전과 스님요사채만 눈에 뜨인다.


지현스님께서 요사채에서 내다보시며 반갑게 웃어 주시는데도 막상 들어서자 당신은 하실 말씀이 없는데 여기까지 찾아왔느냐고 하신다.


그랬는데...지현스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자...어색한 침묵이 언제 있었냐는 듯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다관에서 녹차가 익어서 나오든 말든 스님은 기억의 저 편에 푹 빠지셔서 2시간 30분 동안 딱 두 번!.. 찻잔을 채워주셨다. 


지현스님은 지종스님과 무척 닮았다. 함께 간 미디어팀 보살님이 스님 방에 걸려있는 커다란 자화상이 지종스님인줄 알았다고 말을 할 정도로 지종 스님과 얼굴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지종스님과의 인연도 각별했다.


이제 지현스님의 이야기 속으로....!!!

 

 

지현스님은 고향이 제주도이다. 공부는 부산에서 대학까지 나왔고 시험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갔다가 큰스님(광덕스님)이 쓴 한글 반야심경을 처음 보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큰스님 밑으로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친구가 자신이 존경한다는 제주도 도림스님을 소개해주었고 도림스님이 불광사를 소개해 주었다.


도림스님은 차비로 3만원을 주면서 꼭 모친과 하룻밤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불심 깊은 모친이었지만 아들이 머리 깎는 것은 반대하였고 형 또한 두 번 다시 고향에 오지 말라고 하였기에 다음날 새벽 4시에 홀로 조용히 나섰다.


지현스님은 초등학교 3.4학년 때 국민교육헌장을 반에서 제일 먼저 외웠다. 그런데 그때까지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은 몰랐다. 어느 날 문득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20살이 되고 나이가 들면 죽는구나!’ 싶어서 잠이 안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을 울었다. 그렇지만 스님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 못했고 지현스님도 그랬다.


지현스님의 행자생활은 범어사에서 시작되었다. 그때가 1987년도였고 속가 나이로는 28세였다. 거기서 지종스님을 처음 만났다. 지종스님은 지현스님보다 몇 살 어렸다. 지종스님과는 계도 같이 받게 되었고, 범어사 강원에서도 반은 틀렸지만 같이 있게 되었다. 계를 받자마자 군법사로 다녀온 지종스님은 아랫반이었다.


지종스님은 문도스님들에게 용돈을 받으면 꼭 지현스님께 주었다. 지현스님이 사양하면 맡기는 거라며 나중에 필요하면 달라고 하겠다며 그렇게 주었다. 지종스님이 돌아가시기 전 작년 말까지 그렇게 했다. 그래서 지현스님은 지금도 지종스님이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늘 지현스님 곁에 함께 있는 것 같다고...


지현스님은 통도사 강원에도 있었는데 그때 ‘등불’의 편집장도 맡았다. 그리고 책도 쌓아두고 많이 읽었다. 그때 드는 생각이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사회에 나가서 못할 것이 없겠구나!’ 싶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스님은 ~따..였다. 요즘말로 하면 왕따!였다고... 다른 스님들과 어울리지를 못했다.


선방에 갔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양하는 시간외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스님들과 어울릴 틈이 없었다. 참선을 하다가 잠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정진했다.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포행을 했다. 정말 지독하게 했다. 그렇게 혼자 수행만 하다가 한 선배스님에게 말없이 뺨까지 맞았다. 대중들과 화합하지 않는 당신에게 허물이 있었다며...

 

 


불광원에 계시는 큰스님(광덕스님)을 시봉하게 되었다. 함께 시봉을 맡았던 스님이 나가게 되었고 스님 혼자서 시봉을 하게 되었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추위에도 땀에 옷이 다 젖었다. 나중에는 스님이 부르기만 해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스님 안마해 드리는 손에 정성이 가질 않았다. 그것을 아시고 큰스님은 “내가 공부를 안해서 너한테 신세를 지는구나... 조금만 참자!  내가 행정적인 일(총무원)만 안했어도...”


그런데도 지현스님은 큰스님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방에 방부를 들이기로 약조를 해두었기에 가야만 했다. 큰스님은 지현스님의 선방에 가겠다는 말에 화를 내셨고 한참을 거실에 앉아계시다가 방에 들어가 버리셨다. 정말 고민 고민해서 말씀 드렸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걸망 메고 나오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왔다.

 

선방에서 해제하자마자 다시 큰스님을 찾았다. 선방에서 공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큰 스님 시봉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미 다른 사람들을 다 구해두었으니 더 이상 시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만 듣게 되었다.


지현스님은 그 뒤로 강화도 정수사에서 4년, 부산 마하사에서 4년간 주지 소임을 보게 되었다. 어떤 분들은 주지스님으로만 있었으니 얼마나 복이냐고 한다. 주지 복이 있었다면 아마도 큰스님 시봉을 한 석 달 동안 지은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러나 스님이 정말 원했던 것은 선방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주지소임을 할 때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다. 절을 찾아온 어떤 보살님이 당신에게 주지스님이 어디계시냐고 물어볼 정도로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불광사에는 93년도에 총무스님으로 1년간 있었는데 그것이 전부다. 그때 사시기도를 맡아서 했는데 기도 중에 ‘마하반야바라밀’ 정근만 1시간 30분 했더니, 한 보살님이 찾아와서 좀 줄여줄 수 없느냐고 말을 하더란다. 지현스님은 어떤 기도(수행)도 할 것 같으면 1시간이상은 해야 한다며 그 시간도 스님께는 10분 20분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고...

 


현재...절이 한적한 곳에 있어서 마음 놓고 기도를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신다. 홀로 차 마시다가도 신명나게 목탁을 두드린다. 큰 목탁을 치는 것을 좋아하는데 깨어진 목탁만 벌써 여러 개라고... 늘 스님 곁에 목탁이 놓여져 있다고... 지금도 다(茶)상 옆에 살포시 있다.^.^


이곳은 원래 해동사라는 절이었다. 1981년도에 지어졌는데  언제부터인가 비워져 있었고, 지현스님께서 토굴을 알아보시던 중에 여기 터가 마음에 들어 머물게 되셨다고 한다. 지현스님은 이곳을 친분이 있는 한 거사님으로부터 시주 받으셨다.


2005년도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불사했고 앞으로도 계속 불사를 계획하고 계신다. 현재 공양주 보살님이 안계신데 너무 허름하고 머무를 곳도 마땅치 않아서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수행이라 생각하고 공양을 지어 드시지만 찾아오는 보살님들이 불편해 하기 때문에 곧 공양간 불사부터 하실 거라고 한다.


늘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이 안타까우시다는 스님께 서원이 무엇이냐고 여쭈었다가 혼났다.

“스님이 원이 뭐겠냐고! 도를 깨치는 것이지!”하는데 참 무안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참 당당하고 퍽 어울리는 스님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처음 뵙는 스님이어서 자리가 불편하기도 했는데 스님은 어떠셨을까 생각해보면 참 죄송한 맘이 든다. 그래도 정말 정성껏 회고해주셨던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올리며 앞으로 스님 정진하시는 길에 등불을 환희 밝히시길 기원 드리며 부족하지만 큰스님의 17번째 상좌스님이신 지현스님의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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