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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성지 순례 쌍계사,칠불사,화엄사, 용성스님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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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8.04.14 조회13,1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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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1성지 순례
  쌍계사,칠불사,화엄사, 용성스님생가을
  송파9구에서 다녀왔습니다.

 

  하동 쌍계사

 

  쌍계사(雙磎寺)는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 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쌍계사는 국보 1점(진감국사 대공탑비-국보47호),
  보물 3점(대웅전-보물 500호, 쌍계사 부도-보물 380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925호) 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청학루, 마애불, 명부전, 나한전 등의
  많은 문화유산, 칠불암, 국사암등의 암자가 있으며,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이기도 하다.

  쌍계사는 여러 문화재외에도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가 있고, 화개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벚꽃길에도 차시배지(茶始培地)기념비가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한다.

  현재 혜능대사의 정상이 모셔진 금당(金堂)에 금당선원이 있어
  눈푸른 납자들의 정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전통강원(傳統講院)과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설치되어 바야흐로 선맥과 강맥, 그리고
  율맥의 법통이 바로선 수행도량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날 쌍계사 보살 수계법회가 있었습니다.
  수 많은 대중들이 운집 하였습니다.
  불국 정토가 바로 여기구나 !!!
  아~~~

  대웅전

  금당 으로 올라가는 계단

  금당

  범종각

 

 

 칠불사

 

  칠불사 칠왕자

  칠불사의 창건설화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48년, 가락국 수로왕 7년,
  신라 유리왕 25년, 중국후한 광무제 24년으로 거슬러 간다.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皇玉) 공주가 인도의 아유타왕국에서 東으로 오면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은 수로왕의 왕비가 된뒤 왕자 열 명과 두 공주를 낳는데 태자(太子)
  거등(居登)은 왕위를 계승하고 차자 석(錫)왕자, 3자 명(明)왕자는
  어머니 허왕후의 성을 이어 김해 許씨의 시조로 봉해졌다.
  그리고 남은 일곱 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이며 인도의 승려로
  가락국에 함께 온 보옥선사(寶玉禪師, 장유화상이라고도 함)를
  따라 승려의 길을 걷는다.


일곱 왕자는 외삼촌인 보옥선사를 따라 합천 가야산,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을 거쳐 수도생활을 하다 지리산으로 들어와 반야봉
동남의 주능선인 토끼봉 아래에서 운상원
(雲上院)을 짓고 수도에
들어갔다.
일곱 왕자와 보옥선사의 피나는 수도생활은 헛되지 않아 유난히
달밝은어느밤 일곱왕자는 드디어 세속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바로
칠불사 창건 설화이다.

수로왕62년(서기 103년)
음력 8월 15일 대보름날 밤, 달이 하늘
가운데 떠 삼라만상을
비출 때 보옥선사와 일곱 왕자가 즉흥시를 지어
읊게 되었다.

한 왕자가 "가을이 되니 바람이 서늘하고 보름이
되니 달이 둥글도다"하니
다른 왕자가 "푸른 하늘에
삼경 달이 밝아서 심장과 쓸개까지 환히 비추는 구나"
라고 대답하고 또 다른 왕자는 땅위에다 동그라미를 그리고선 지워 버렸다.
다른 왕자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서 덜커덩 하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그 쇳소리가 휴휴암좌선문의
하지일성
곧 깨달음의 소리였던가.
일곱 왕자는 그 쇳소리를 듣고
성불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일곱 왕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의 부처로 탄생했다.
  금왕 광불(光佛), 당불(幢佛), 상불(相佛), 행불(行佛), 향불(香佛),
  성불(性佛), 공불(空佛)등 일곱 부처가 탄생한 것이다.

  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를 찾아 지리산에 온다.성불한 왕자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옥선사는 불법의 엄한 계율에 따라 쉽게 대면시키지 않았다.
  대신 칠불사 경내의 맑고 푸른 연못을 지켜보라 했는데 연못 속에는 일곱 왕자의
  금빛 찬란한 모습이 비쳐졌다.


 그 연못은 그림자가 비쳐진 연못이라 해 영지(影池)로 불린다.
 그로부터 일곱 왕자가 수도하던 운상원 즉 칠불암이 칠불사로불리게 됐다.
당시 수로왕이 머문 곳은 칠불사 아래의 범왕(梵旺). 왕비가
머물며 천비사(天비(女比)寺)를 세운 곳을 쌍계사 못미쳐
있는 마을로 대비촌(大비(女比)村)이라 불렀으며 3정승이
기다리던 곳은 삼정(三政)으로 불렀다 한다.

일곱왕자를 성불시킨 보옥선사, 즉 장유화상은 이땅에 불교를 전래하기 위해 당시 어려움을 피해 쉽게 포기할지도 모를 왕자들을 깊은 산중으로 인도해 수도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김해의 장유면이란 지명과 연관성이 깊다.

보옥선사는 거문고의 명인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불교와 음악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있으며 지리산 범패음곡의 원류로도 보인다.
특히 운상원과 남원의 운봉, 그리고 보옥선사와 옥보고의 음악이 지리산이 음악의 산실이었다는 삼국사기등의 기록을 두고 볼때 아직 명확한 규명은 되지않고 있으나 지리산 음악의 원류임은 명백한 듯하다.

 


 성불한 칠왕자의 모습을 비추었다는 영지



                                   아(亞)자방

칠불사의 중요한 부분은 또한
세계건축대사전에도 기록될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
아자방(亞字房)을 빼놓을 수 없다.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 또는 겨우내
훈훈한 온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이 방은 100명이 좌선할 수 있으며
건축이래 한번도 개수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신라 효공왕때
김해에서 온 어느 선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다.
100년마다 한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써 청소를하면 아무런 부작용이 없이

불이 잘 지펴져 방주위의 높은 곳부터
따뜻해져 그 온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
이 아자방에서 수도를 통해 득도한
고승은 수없이 많다.

서산대사는 수도를 한후 아자방에
관한 시를 짓기도 했는데 막연히
신라적 절이라고 해 칠불사가 오랜
절임을 말하기도 했다.
칠불사의 아자방은 칠불사 창건
설화 못지않게 오랜 세월을
보내오면서 수많은 설화를
간직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곱왕자의 성불이 깃들인 칠불사는 그러나 1800년에 화재가 나 보광전 약사전 신선당
  벽안당 미타전 칠불상각 보설루 요사등 10여 동이 불타버렸으나 다시 복구됐다.
  칠불사는 또 그후 빨치산과 국군토벌대와의 교전이 치열한 와중에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의혹을 사 다시 불타는 아픔을 겪고 78년부터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락국의 신비와 우리나라의 불교문화 전래과정과 지리산 음악, 천년 온돌
  아자방과 아자방에서 득도한 수많은 고승들의 발자취, 그리고 전쟁의 아픔은
  물론 우리 선조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지리산 화개골과
  칠불사는 영원토록 우리 민족과 함께 할 것이다.

 

  칠불사 가는길

  칠불사 법당

  범종

 

 

구례 화엄사

 

  백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았다 하여
  두류산이라 불리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 이 지리산에 여의주가 하나 있으니
  그곳이 바로 화엄사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서기 544)에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서 온 연기스님에 의해서 창건된 천년의 고찰이다.

  이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셔와
  4사자 3층석탑(불사리공양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후 의상대사가 화엄사에 주석하시면서 문무왕 10년(서기 670)에
  3층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면을 화엄석경으로 둘렀는데
  이로써 화엄사는 대도량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어 나말여초에
  화엄사에 주석하셨던 도선국사가 화엄사를 총림으로 키우니
  이 때 개창이래 최대 규모를 가진 대총림이 되었다.

 
         
천년의 화엄성지
           

고려시대에 광종의 어명을 받은 홍경선사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중수 및
보수가 이루어졌고, 문종대(1047~1083)에도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으며
의상대사의 덕을 흠모한 대각국사가 화엄사에 주석했던 때도 바로 이 때였다.

그후 화엄사는 인종(1126~1146)때 정인왕사(定仁王師)에 의해 중수되었고
명종2년(1172)에는 도선국사비가 건립되었고 충렬왕(1313~1330)때
원소암(圓炤庵)이 중건되었다. 조선초인 세종 6년(1462)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8가람 81암자의
모든 당우와 보물들이 일시에 불타버렸고 인조 8년(1699)에 벽암선사와
그 문도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화엄사의 가람배치는 효종원년(1649)에 화엄사가 다시
선종대가람으로 승격된 직후 계파선사에 의한 장육전 중건(1699)부터이다.
장육전이 각황전으로 중건되자 숙종은 친히 각황전이라 사액하였다.

화엄사가 오늘의 대화엄사로 발전하기까지는 도광(導光)선사의
중창원력에 의해서이다. 도광선사는 대웅전 및 각 요사를 중수하는 등
퇴락한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지난 1995년에는
서5층석탑(보물 제 133호)의 보수공사 도중에 부처님 진신사리
22과와 성보유물 16종 72점이 발굴되어 화엄사는 선교양종
대본산으로서의 사격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화엄사 입구

  대웅전 부처님

  각황전

  화엄사는 겉에은 단청이 되어있지 않았고,
  각 법당 안에  단청이 되어 있었습니다.

  각황전은 앞쪽 불보살님

  각황전 뒷쪽 아미타부처님 입상 [영구위패가 모셔져있음]

  웅장하고 아름다운 화엄의 세계

  바쁜 일정으로 유일한 단체사진 입니다.

  조금 있으면 사월초파일 
  가는곳 마다 연등이 장엄 되었습니다. 

  버스 안에 보성월보살님 ㅋㅋㅋ

 

 

용성스님 생가 [죽림정사]

 

백용성스님생가/전북장수

근대 고승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의 생가가 9일 전북 장수 장안산 자락 생가터에 복원됐다.


용성 스님은 전 생애를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중흥을 위해 살았으며,
당시 어려운 한문으로 된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불교 대중화의
새 장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박범훈 중앙대 총장은 그의 논문에서

용성 스님을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작시, 작곡의 초조라고 밝힌 바 있다.

그동안 용성 스님 생가터는 파밭으로 방치돼 있었는데,
후학들과 국가보훈처, 전북 장수군 등에서 적극 지원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또 죽림정사에는 대웅전 외에도 교육관, 기념관, 행당, 요사채 등이 건립돼
있다. 또 한반도 모양의 연못도 조성됐고, 연못에는
기미년 3·1운동 때
전국을 뒤덮었던 태극기 표지석도 건립됐다.

 

죽림정사 대웅전

 

 

 

법당

 

 

용성 스님 동상

 

주장자[주장자 머리부터 끝까지 한문으로 글씨가 새겨 있었습니다.


 

1921년 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한 것을 비롯해 원각경,능엄경 등을펴내
불교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사용 하시든 물건[염주와 단주]

 

 


 

용성 스님은 경허 스님과 함께 근대 한국불교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스님이다.
경허 스님이 선(禪) 수행으로 이름을 떨친 반면 용성 스님은 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섰다.

스님은 1911년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첫 불교 포교당인 대각사를 세워 대중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하는 등 20여권의 한글
불경을 출판해 불경의 한글화를 주도했다. 또 수선회(修禪會) 등을 통해 참선 수행을 가르쳤으며,
찬불가를 처음으로 만든 불교의 선각자였다.

3ㆍ1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을 지도했고, 윤봉길 의사에게 임시정부로 가서
항일운동을 할 것을 권유했는가 하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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