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 장승업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일등 공신은 영화 ‘취화선(醉畵仙)’이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의 98번째 작품으로 제작된 ‘취화선’은 제목 그대로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신선’, 즉 장승업의 삶을 다룬 영화다. 임 감독과 도올 김용옥 선생이 각본을 함께 쓰고 촬영 정일성, 음악 김영동, 장승업 역 최민식으로 화제를 모았고 그해 칸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받았다.
임권택 감독은 장승업을 소재로 삼은 까닭을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승업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1978년께였어요. 그때야 장승업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죠. 다만 이 사람이 임금이 그림을 그리라는데도 그게 싫어서 뛰쳐나갔다는 게 내 마음에 들었어요. 그때는 그런 게 속 시원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다가 2000년 12월에 서울대 박물관에서 장승업에 관한 세미나를 들으면서 비로소 영화로 만들어야겠구나 결심했어요.”
임 감독이 장승업을 선택한 이유는 네 가지였다. 첫째 그 생애가 영화로 다루기에 매력이 있다는 것, 둘째 지금도 장승업 그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는 것, 셋째 시대의 한계 안에서도 무언가를 해보려고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것, 넷째 장승업의 그림이 외세의 침략에 기울어 가는 나라와 그 와중에 부대끼며 곤궁한 백성을 위로하는 뭔가 강력한 힘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화 몇 가지를 뼈대로 영상을 꾸려가자니 힘이 부쳤지만 임 감독은 ‘오원의 힘’으로 난관을 헤쳐 갔다고 회고한다.
“한 작가가 프로로서 끊임없이 거듭나고자, 정말 거듭나고자 평생 노력하는 그런 것이 소중하다고 봤지요. 확실하게 이룬 자보다는 미완이면서 완성으로 향하면서 이루어내고자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만의 매력이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 마음에도 가깝게 와 닿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오원 장승업 작 ‘추정귀선(秋庭龜仙: 가을 마당의 거북신선)’, 지본담채 | |
임 감독의 이런 생각은 영화 속에서 최민식의 입을 빌려 대사로 터져 나온다. “문자향? 시서화 삼절? 좋아하시네, 니기미. 야! 제발이 꼭 붙어야 그림이냐. 그림은 그림대로 보기 좋으면 끝나는 거야. 그림이 안 되는 새끼들이 거기다 시를 쓰고 공맹을 팔아서 세인들의 눈을 속여 먹을랴구 그래. 여봐, 술이나 더 가져와!”
영화 ‘취화선’이 나오기 10년 전에 이미 오원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연극 한 편이 있었다. 국립극단이 91년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사로잡힌 영혼’이다. 이상현 작, 김아라 연출의 ‘사로잡힌 영혼’은 오원이 남긴 몇 가지 일화에 연극적 상상력으로 옷을 입혀 당시로서는 충실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냈다.
“고주망태 장승업, 일자무식 장승업, 그림 하나 잘 그려 감찰나리 되셨네, 감찰나리 되셨어”라는 노래가 들려오면서 사내들의 대사가 이어진다. “어, 일자무식 장승업이 정6품 감찰이라니!” “고향이 어딘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개구멍받이가!” “아주개 지물포에서 도배지 그림 시중들다가 손재주 하나 타고난 덕에.” “장가 그림에는 귀신이 붙었다며! 대나무를 그리면 대숲에서 바람소리가 나고 어부를 그리면 뱃전에서 노 젓는 소리가 난다며?” “장안에 권문세가 치고 장가 그림 한 장 안 걸린 집 없지!” “돈도 숱해 벌었어. 하지만 한 푼도 제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다네. 셈은 주모가 맡아서 다 했으니!”
연극 ‘사로잡힌 영혼’을 관통하는 한마디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다. 사대부 지식인층이 오원의 그림에 없다고 혀를 차는 이 말씀에 오원은 답한다. “그런 말씀 여지껏 수차 들었습니다요. 소인의 그림에는 문자향 서권기가 없다고요. 한데 그게 뭡니까요. 아무리 들어도 무슨 소린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요.” “글자 그대로지. 문자의 향훈과 서책의 기운!” “그게 당최!”
오원이 문자향 서권기 대신에 그림에서 찾은 것은 무엇일까. “소인에겐 그림이 부모입지요. 그림이 밥 먹여주고, 술 먹여 주고 게다가 세상에서는 풀 수 없는 온갖 한을 그림 속에서는 다 풀게 해줬으니, 그보다 더한 부모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자신을 옭아매는 세상 쇠사슬 훌훌 털고 자유롭게 자연 속으로 들어간 오원은 읊조린다. “어찌 종이와 비단 위에 그린 것만이 그림이겠느냐… 종소리는 날줄로 풀 향기는 씨줄로 노을은 물을 들이니, 삼라만상이 어찌 이리도 거룩하고 아름다우냐!”
女色과 美酒와 그림만을 벗 삼아
오원 장승업 작 ‘삼인문년(三人問年: 세 사람이 나이를 묻다)’, 견본채색 | |
오원 장승업은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인물의 풍모를 닮았다. 기록은 적고 일화는 많다. 기행으로 점철된 화가의 쉰네 해 일생은 ‘이러저러했다더라’는 풍문형 서술로 이어진다.
오원의 삶과 예술을 그나마 전문가의 눈으로 서술한 이는 화가이자 작가인 근원 김용준(1904~67)이다. 1948년에 펴낸 수필집 『근원수필(近園隋筆)』에 ‘오원일사’란 글을 실어 선배 화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선과 필세에 대한 감상안을 갖지 못한 나로서도 오원화(吾園畵)의 일격에 여지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오원을 논하고 그의 전기를 쓸 진지한 연구가가 후일 나타날 것으로 믿고 나는 오직 그를 추모하는 나머지 지금 이 일문을 적는 데 불과하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오원의 외모부터 묘사한다. “그는 얼굴 모습이 약간 기름한 데다가 조선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노오란 동공을 가진 것과 주독 때문인지 코끝이 좀 불그스름하고 우뚝한 코밑에는 까무잡잡한 수엽이 우스꽝스럽게 붙은 것이 특색이었다… 쨍쨍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거나하게 술이 취하여 세상사가 어찌 되든 나에게는 언제든지 청풍과 명월이 있다는 듯 소방(疎放)한 걸음걸이로 발을 옮겨 놓는 것도 보는 사람의 흥미를 끌거니와 그는 취월(청록에 가까운 빛) 창의를 입었다는 것이 더욱 이채였다.”
근원에 따르면 오원은 천애 고아로 역관이었던 이응헌(李應憲)의 집에서 심부름꾼으로 기식하며 어깨너머로 그림을 익혔는데 글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눈썰미가 좋아 한번 본 그림은 뇌리에 깊이 새긴 뒤 제 그림 세계로 바꿀 줄 아는 타고난 천재였다. 그는 화가들의 호에 원(園) 자가 많은 것을 보고 ‘나도 원 자를 붙여 보자’ 하여 스스로 ‘나도 원’이란 뜻의 오원(吾園)이라 하였으니 한번 화명(畵名)을 날리매 그림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조석으로 성시를 이뤘다.
오직 여색(女色)과 미주(美酒)와 그림뿐이 그의 유일한 벗이었으나 그렇다고 그림에 붙들리는 법이 없이 무심하였다고 한다. 오원의 그림 솜씨가 장안에 소문이 나자 그의 그림을 사랑하던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의 추천으로 고종 황제께 불려가나 갇혀 있는 삶을 참을 수 없던 오원은 부귀영화를 차버리고 여러 차례 도망을 가버린다.
오원은 54세로서 몰(歿)하였다고 하나 죽은 것이 아니라 행방불명으로 사라졌다고 하는 말이 더 믿음직하다. 근원은 애틋하게 그를 추모한다. “이리하여 오원은 전생의 숙업인 것처럼 배운 적 없는 그림에 천성으로 종사하다가 그 세상을 버림이 또한 신선이 잠깐 머물다 가듯 하였으니… 너무나 기발한 그의 생애가 마치 신화 속의 인물이나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종의 신비적인 선모심(羨慕心)을 자아내게 한다. 아마도 오원은 신선이 되었나 보다.”
‘정치학자 이용희’이자 ‘미술사학자 이동주’로 산 동주(東洲) 선생(1917~97)은 저서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에서 오원을 “한말 최대의 화가일 뿐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도 손꼽을 수 있는 화가”라 평가한다. 장지연의 『일사유사(逸事遺事)』에 일화가 많이 나와 있다고 소개한 동주 선생은 “오원은 글씨를 못 써서 오원 낙관으로 되어 있는 대필이 참 많다”며 “그런 식으로 일자무식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림으로만 이렇게 유명했느냐 이것이 생각해 볼 것”이라고 지적한다. 근원의 말 속에서 그 대답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일자무식이면서라도 먼저 흉중의 고고특절(高古特絶)한 품성이 필요하니 이 품성이 곧 문자향이요 서권기일 것이다. 오원의 그림은 여기서 나왔다. 좋은 작가는 의재필선(意在筆先)하는 정신 속에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