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광사 . 불광법회 대원 2 구 ★
( 자인사 . 심원사 사찰순례를 다녀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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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8일 불광사 . 불광법회 대원 2구 식구들은 08시 50분에 불광사 앞에서 출발하여 포천시 영북면에 소재한 산정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답고, 유서깊은 명성산 자인사로 사찰 순례 법회를 다녀 왔습니다
이날 아침 08경 집에서 출발하는데 차창에 약간의 가는 비가 떨어지는가 싶더니만 불광사에 도착할 즈음해서는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일정에 가벼운 등산과 각 법등별 족구대회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출발부터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어 일단은 자인사 예불에 참석후 추후 임원진에서 다시 계획을 수정키로 하는등 약간의 어려움이 있는듯 하였으나
비가오는 관계로 당초의 계획에 차질이 자인사 예불참여 차질로 이어져 회주스님의 스케줄에 변경이 있어 불가피하게 상좌 지현스님의 예불로 대신하였습니다 이후 예불을 마치고 자인사 공양간에서 뷰페식으로 마련된 점심을 맞있게들 먹고 근처에 있는 심원사를 방문하기로 하고 2시 30분에 자인사를 출발하여 심원사에 도착하니
마침 심원사에서는 천도제를 막 시작할려고 하였으나 많은 거사(우리들)들이 심원사를 방문하는 모습을 보신 총무스님께서 불광사에서 왔다고 하니까 평소에도 광덕 큰 스님을 깊이 존경하였다고 하시면서 천도제 마져 연기를 하시고 저희들을 위하여 아주 반갑게 맞이하시면서 감로의 법을 주셨습니다 심원사에서 법등회의를 끝으로 공식적인 순례 일정을 마무리 하고 ...........
이후 이동 갈비와 곡차를 겸하여 법등식구 서로간의 우의를 다지는 시간을 가졌으며 식사후 지하 노래방에서 다들 숨겨둔 끼와 18번을 애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전 답사와 준비에 노력하신 임원진과 많은 보시를 하여주신 법등식구분들에게 많은 찬탄의 박수와 특히 원로분께서 함께 자리를 하여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
☞ [극락전을 바라보며 ]
자인사(慈仁寺)는 경기도 포천시와 강원도 철원군을 경계로 하고 있는 명성산(鳴聲山) 자락에 위치한 전통사찰이다.
궁예가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패한 후 이곳으로 쫓겨와 크게 울었다고 하여 이름 붙은 명성산은 산정호수와 어우러진 험준한 암벽과 억새밭이 절경을 이룬다.
명성산의 깎아지른 암벽을 배경으로 사찰이 서 있다. 자인사에는 여느 가람과는 달리 특이하게 조성해 놓은 미륵석좌상이 있으며, 그 뒤로는 외관이 화려한 극락보전이 있다. |
☞ 극락전 전면

★..... 마치 불국사를 연상케 하는 청운교, 백운교 계단이 인상적이 였습니다 |
☞ 미륵불

★..... 자인사에는 여느 가람과는 달리 특이하게 조성해 놓은 미륵석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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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에 글을 쓰 놓았습니다 ☜┛
★..... 자인사는 절 입구에 일주문이 없고 대신 계단에 다가
{ 당신(불자님)은 지금 간좌곤향의 미륵 부처님께로 토생금의 태문을 통하여 32 서사택중
제일 길택인 연년득립의 계단을 올라가고 계십니다 } 라는 문구를 쓰 놓았으며 구석 구석 계단
마다 각기 다른 글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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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잿터바위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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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로수
 ★... 특히나 자인사는 물 맛이 좋다고 하는군요 |
☞범 종
★... 범종에 명성산 자인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 입구에도 명성산 자인사라고 되어
있더군요 |
☞ 법당안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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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산 자인사 연혁
★... 궁예왕(?-918)은 서기 901년 송악( 松岳: 개성 )에 도읍(都邑)을 정했다가 5년 후(서기905년) 지금의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한 후 그의 휘하 부장이었던 왕건 (877-943)을 시켜 후백제를 공격했다. 이 때 왕건은 산자수명한 이곳에서 산제(山祭)를 지내고 꿈에 현몽을 받아 승전했고, 훗날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 밀리고 쫓겨 지금의 명성산성(약4-5Km전방에 산성이 현존함)에 진을 쳤을 때, 이곳 커다란 바위에 제사상을 차리고 자주 기도를 올리던 "터"였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태조에 재위하자 이곳에 조그만 암자를 세우니, 그의 시호를 따서 절 이름을 신성암(神聖庵)이라 명명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나 300여 년이 지난 후 산불에 의해 소실되자 층열왕 3년(1227년)에 다시 재건하고 암자 이름을 왕건의 자호를 본 따 약천암이라 했다. 그 뒤 거란침입과 몽고침략, 6.25 사변 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는 동안 남북의 길목으로서 자주 전쟁터였던 관계로 정확한 문헌과 역사적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절의 형체는 간 곳 없고 절터와 민가의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만이 남아 있었다. 1964년 김해공 스님이 현지에 허물어진 축대와 옛 법당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주춧돌만 몇 개 나뒹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곳을 말끔히 다듬고 석고로 된 18척의 미륵불 입상을 조성한 후 13평의 조그만 암자를 세우고 절 이름을 자인사(慈仁寺)라고 명명하였다.
「미륵」이란 말의 본뜻이 불가(佛家)에서 자비(慈悲)라는 말이고 궁예왕이 미륵세계를 구현코자함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 慈仁이란「仁」자는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라 하여 영계(靈界)에서나마 궁예왕과 태조 왕건의 “맺힌 악연( 惡緣)을 풀고 미륵세계를 구현하소서”하는 기원의 의미로 지어진 절 이름이었다. 1993년 지금의 정영도 스님이 국민관광지에 어울리도록 석고미륵불이 서 계시던 곳에「극락보전」을 다시 짓고 미륵좌불 (彌勒座佛)을 새로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사찰내의 연혁 안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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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오는 관계로 미쳐 둘러보지 못한 곳 사진으로 대신 올립니다

★..... 극락보전 앞에 오르니 일반적으로 사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상이 극락보전의 양쪽 기둥 앞에 세워져 있는 모습

★..... 오른 쪽 돼지 형상의 사천왕상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지나가는 불자들을 살펴보고 있다

★..... 왼쪽에 위치한 사천왕상의 가슴에는 또 다른 부처가 새겨져 있는 모습

아름다운 단청

아름다운 용 모습

극락보전 중앙문에서 뒤돌아본 모습

특이한 용마루

아름다운 단청

청운교 . 백운교를 연상하는 극락전 올라가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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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원사 총무 화담스님

★... 불광사에서 왔다고 하니까 평소에도 광덕 큰 스님을 존경해 왔다고 하시면서
천도제까지 연기하시면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시고 좋은 감로의 설법을 주시는 총무스님
이십니다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
★... 심원사는 지장도량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찰이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1리 72번지에 위치한 심원사는 ‘생지장보살 도량(生地藏菩薩 道場)’으로 불린다.
심원사에는 ‘지장영험비’가 있으며, 지장보살의 영험함을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사냥꾼 형제의 출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17년(720) 의 일로 보개산 아래 마을에 산짐승을 잡아 목숨을 이어가던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제는 사냥에 나서 보개산 너머 담터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고, 순석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마치 금란가사를 두른 듯한 누런 멧돼지는 왼쪽 앞다리에 화살을 맞고 보개산 정상인 환희봉 쪽으로 달아났다.
사냥꾼 형제는 핏자국을 따라 멧돼지가 멈춘 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금빛 멧돼지는 볼 수 없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돌로 된 지장보살상이 맑은 물이 넘쳐나는 샘물 가운데 상반신만 내놓은 채 있었다.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석상은 태산 같은 무게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크게 놀란 형제는 깨달은 바 있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대성(大聖)이시여! 저희들을 죄에서 구해 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마땅히 출가하여 수도하겠나이다.” 다음 날 형제가 그곳으로 가 보니 과연 석상이 돌 위에 있으므로 두 사람은 바로 300여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출가하였다.
샘 옆의 숲 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고 항상 그 위에 앉아 정진하였으므로 그곳을 석대암(石臺庵)이라고 불렀다. 암자에는 자신들의 화살에 맞은 석상을 모셨다. 견불령(見佛嶺)과 대광리(大光里)라는 지명도 지장보살석상의 영험에서 유래한다.
고려 초의 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 심원사 아래 마을에 어려서 열병을 얻어 장님과 앉은뱅이가 된 이덕기와 박춘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심원사 대종불사를 하기 위해 마을에 내려온 화주 스님에게 “대종불사에 시주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재앙이 소멸되고, 현생에서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화주가 되기로 약속했다.
3년여 동안 이들은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시주를 하였으며, 마침내 대종불사의 타종식 날이 되었다. 첫 타종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앉은뱅이 박춘식은 오색구름을 타고 밝은 구슬을 손에 지닌 지장보살님께서 하늘에서 심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앉은뱅이는 “지장보살님이 보인다”고 소리치며 장님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자 두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덕기 또한 “어디! 어디!”하고 소리치며 눈을 비비자 앞이 보였다. 그들은 산 마루 위의 오색구름에 쌓여 큰 빛을 발하고 힜는 지장보살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절하였다. 마침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었다.
그들이 지장보살님을 본 고개를 견불령, 그들이 살던 마을을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라 불렀다. 애초에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심원사에서 서남쪽으로 약20km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寶蓋山)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주산(靈珠山, 보개산의 옛이름)에 흥림사(興林寺, 심원사의 옛 이름)로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사로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지로 주석하며 삼창(三創)하고 산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절이름을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이후 수많은 영험이 생기며 사세가 확장되었으며 근세에까지 금강산 유점사에 딸린 말사(末寺)로 석대암, 지장암, 남암 등의 산내암자와 250칸의 당우, 1609위의 불상, 탱화, 탑이 있었던 대찰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6.25 전쟁의 참화로 본당이 천불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천불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석대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의 절터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부도 12기와 아미타불 입상, 사적비, 공적비 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부도 가운데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의승군을 이끌었던 제월당 경헌(霽月堂 敬軒) 스님의 부도는 옥개석 운룡문(雲龍紋) 조각 솜씨가 빼어나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야 하며, 아미타불입상을 포함해 사지(寺址)에 대한 전체적인 문화재조사가 시급하다는 것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옛 절터는 군부대 안에 있어 순례하려면 미리 군부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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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법을 듣고 있는 대원 2구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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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진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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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려한 대웅전 모습 ☜┛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1) 영원(靈源)이 창건하였다. 영원은 보개산에 영원사(靈源寺)· 법화사(法華寺)와 함께 이 절을 세웠는데, 당시에는 흥림사(興林寺)라고 하였다. 고려 때 나머지 절은 폐사되었으나 이 절만은 명맥을 유지했다. 720년(성덕왕 19) 사냥꾼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지장보살의 감화를 입어 석대암(石臺庵)을 세웠으며, 이후 우리 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로 이름났다.
859년(헌안왕 3) 범일(梵日)이 천불을 조성했고, 1393년(조선 태조 2) 불에 탄 것을 1395년에 자초(自超)가 중창하면서 산 이름을 영주산(靈珠山)에서 현재의 보개산으로 바꾸고 절 이름도 심원사로 고쳤다고 한다. 1398년 성주암, 1400년(정종 2) 석대암을 각각 중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595년 인숭(印崇)과 정인(正印) 등이 중건했다. 이후 많은 고승을 배출하고 천불전과 해장전 등 건물 만도 250칸이 넘는 대사찰로 발전했으나 1907년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고 말았다. 1909년 연수 등이 중창하였으며, 1931년 사찰 건물의 내부를 완전히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절이 불에 탔고, 전쟁 후에는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자 1955년 김상기(金相基)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다. 본래 절터의 위치는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이다. 1962년 명주전을 짓고, 1970년에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명주전과 대웅전·삼성각·노전·화산경원 등이 있다. 이 중 화산경원은 1935년 한규설(韓圭卨)의 부인 박선심화(朴善心華)가 지장보살의 발광을 보고 시주하여 지은 불교연구원이다. 유물로는 1991년 4월 1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재138호로 지정된 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이 있으며, 옛 절터에 사적비와 공적비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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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주전
★... 우리가 갔을때 여기서 막 천도제를 시작할려고 하였습니다 |
☞ 명주전의 아름다운 문살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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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제일의 생지장보살 기도도량 심원사
고통받는 중생들을 다 제도하고서야 깨달음을 이루고. 지옥이 다빌 때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는 서원을 세웠던 지장보살. 심원사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동송읍이 아니라 설악. 오대산등과 함께 명산으로 손꼽히던신서면(현 연천군) 보개산 자락이었다.
심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진덕여왕 원년인 647년. 영원조사가 영원사. 법화사. 도리사와 함께 영주산(현 보개산)의 4대사찰중 하나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흥림사였다. 흥림사가 현재의 심원사로 개칭된 것은 1397년 무학대사에 의해서이다. 그 뒤에도 임진왜란의 병화와 1907년 일본군과의 싸움을 거치면서 당우가 전소되는 참사를 맞이했으나 스님들과 불자들은 굴하지 않고 복구와 중창을 거듭했다.
특히 1927년에는 보통강 습소를 설립하여 인근의 고아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으며 1935년에는 백일기도 중에 지장보살의 현현을 목격한 독립운동가 한규설의 부인 박선심화보살과 그녀의 동생 박대선화보살의 회사로 화산경원을 설립. 경학연구의 중심도량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오늘날 큰 스님중 이 화산경원 출신인 많음은 당시 화산경원의 위상을 입증해준다. 심원사는 6 . 25이전만 해도 2백 50여칸의 당우와 4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거찰이자 숱한 고승들을 배출한 중부내륙지방의 중심 도량이었다.6 . 25동란으로 잿더미가 된 심원사 옛터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때1955년 4월이었다.
당시 주지 김상기 스님은 현 위치로 옮겨 조그만 절을 짓고 심원사로 편액하였다. 지장보살 이 모셔진 현재의 명주전이 지어진 것은 그 뒤인 1962년의 일이었다. 지장보살의 원력을 믿는 스님들과 불자들의 노력으로 심원사는 오랜 상처를 딛고 현재의 자리로 당우를 옮겨 다시 조금씩 일어서 지금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불자들이 찾아오는 명찰로 거듭나고 있다.
현재 옛 심웒사지는 군부대 내에 자리잡고 있다. 심원사지에는 이곳이 우람한 당우를 자랑했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천년고찰임을 입증해주는 역대 고승들의 부도 12기. 그리고 박선심화. 박대선화 보살의 공덕비를 비롯한 비석 3기가 남아있다. 부도중 제월대사비는 선조의 여덟번째 왕자인 의창군이 글씨를 썼으며 옥개석의 조각수법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취운당대사비에는 총탄 자국이 나있어 이곳이 불행한 우리역사의 현장임을 너무도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다. 현재 심원사지 부도밭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38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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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사진 날짜를 셋팅을 하지 않아서 날짜가 2003년 2 월 9일로
나오점 사과 드립니다
{ 사진 일자와 상관 없이 순례 일자는 2008년 5월 18일 일요일 이였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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