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천자암에 철야기도를 다녀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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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8.06.30 조회14,531회 댓글0건본문
좋은 도반 들과 송광사 천자암에 철야를 다녀왔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감명 깊었기에~
[영화실의 향기](3) 조계산 천자암 활안스님 | ||
입력: 2007년 02월 23일 15:03:02 | ||
천지간에 때이른 훈풍이 그득했다. 경사 아득한 외길을 따라 조계산 천자암(天子庵)에 오른다. 전남 순천 송광사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 배배 꼬인 채 곧게 자란 아름드리 향나무 두그루가 마치 사이좋은 도반처럼 나란히 서있다. 고려말 보조국사 지눌스님과 제자인 담당국사가 천자암을 세우면서 꽂아둔 지팡이가 싹을 틔웠다고 전해지는 ‘곱향나무 쌍향수(雙香樹·천연기념물 제88호)’다. 800년 세월에도 여전히 푸르고 위풍당당한 곱향나무 아래서 천자암 조실이자 조계종 원로위원인 활안(活眼·81) 스님이 맞아준다. 스님은 팔순의 노납에도 체구가 당당하고, 얼굴에는 동안의 미소가 가득했다. “그동안 글쓰는 일로 얻은 걸 내게 내놔 봐.” 노장은 주석처인 ‘염화조실(拈花祖室)’에 자리잡자마자 탐간영초(探竿影草·선사가 학인의 역량을 알아보기 위해 방편으로 하는 질문)를 던졌다. “대동태허(大同太虛)가 공전자전해도 마음이 단박에 밝아야 돼. 마음에 중심이 딱 서 있으면 천지생명은 단독결정이고 일망타진이야. 다른 방법은 필요없어. 마음을 분석하면 근거가 없어.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이루어지기 전이어서 하자가 발붙일 곳이 없어. 그런 도리를 알겠는가.” 스님은 숨쉴 틈도 없이 할(喝)을 몰아쳤다. 듣던 대로 스님의 서슬은 속인이라고 조금도 덜함이 없었다. ‘조계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눈뜬 장님’을 ‘활안’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여봐, 여봐, 나를 똑바로 봐! 마음이 몸뚱이의 주인이고 씨앗이야. 한 호흡이면 생명이 새로 태어나고, 써도써도 결코 줄어들질 않아. 생명을 스스로 만들고 끝까지 뒤처리해야 돼.” 스님은 ‘마음’과 ‘생명’을 수없이 강조했다.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화 수식의 살점을 모두 발라내버린 ‘원형질’의 법담이어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찻물이 끓었다. 스님은 한순간 서릿발 같은 표정을 풀고 다정한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스님은 “요즘 정치인이나 글쓰는 사람이나 학자나 얄팍한 계산으로 아는 데는 귀신인데 뒤처리하는 데는 등신”이라면서 “몸뚱이만 있고 눈이 없어서 마음을 밝게 이끌 줄 모른다”고 했다. “공부에는 상하 근기가 따로 없고, 소승 대승 구분이 없고, 일등 이등이 필요없어. 공부가 안되는 것은 마음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지. 오직 마음만 바로 정해지면 뜨거워서 견딜 수 없도록 노력을 해야 활활 태울 수 있고, 차가워서 견딜 수 없도록 해야 꽝꽝 얼어버리지.” 활안스님은 평생 빈틈없는 수행으로 일관했다. 열아홉살 때 출가해 ‘나고 죽는 그 이전의 나는 무엇인가(生滅未生前 是甚麻)’를 화두로 참선 정진했다. 스님은 천자암으로 오기 전 오대산에 30년 가까이 머물렀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오대산 적멸보궁과 북대를 오가며 수행하는 동안 ‘오대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번 좌복에 앉으면 온종일 꼼짝도 하지 않는 집중력은 선방 스님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스러져가는 오대산 북대를 오늘의 도량으로 일궈낸 이가 바로 활안스님이다. 6·25 당시 월정사의 탄허스님이 인민군에게 붙들려 갔을 때 홀로 찾아가 담판을 지어 구출해낸 일화도 남겼다. 스님은 초심이 흔들리거나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부처님을 만나는 기연을 얻었다고 했다. 태백산 동암에서는 참선중 비몽사몽간에 땅이 갈라지면서 부처님의 오색 전신사리를 받아냈다. 전남 광양의 백운산에서 홀로 토굴을 짓고 수행을 할 때는 부처님이 “너만 외로운 것이 아니란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들도 다 그렇게 외로웠단다” 하면서 팔베개를 해주는 꿈을 꿨다. 스님이 송광사 구산스님의 권유로 천자암에 머문 지는 30년이 넘는다. 1974년 처음 들어왔을 때 천자암은 조계종단의 맥을 세운 보조국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암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스러져가는 전각 한 채만 달랑 남아 있었다. 스님은 불사(佛事)와 주경야선(晝耕夜禪) 정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며 직접 양식을 져 나르고, 나무를 하면서 천자암을 정비했다. 워낙 험한 오지여서 신도들의 시주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거의 혼자 힘으로 법당을 올리고 법왕루, 종각, 나한전, 산신각과 요사채를 들여 규모를 갖췄다. “천자암을 일으켜 보조스님께 밥값을 해야겠다고 뜻을 세웠지. 이제는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을 얼추 끝냈으니 후학들을 키우는 일만 남았어.” 스님은 지금도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직접 목탁을 들고 도량석에 나선다. 일제징용, 한국전쟁, 5·18광주항쟁, 이라크전쟁, 미국 9·11테러 등 재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천도기도도 빼놓지 않는 일과다. 천자암에서는 누구나 수행과 울력을 병행해야 한다. 이것은 활안스님의 변치않는 초심이다. 암자 주변에는 채마밭과 차밭, 감자밭이 있다. 스님은 일을 할 때도 용맹정진하듯 밀어붙여 보통사람의 2~3배를 한다. 스님은 천자암에서 열세 차례나 문을 걸어잠그고 백일정진을 해냈다. 일념정진을 거듭하던 스님은 어느날 홀연히 밝아오는 소식에 오도송(悟道頌)을 읊는다. 스님의 개오(開悟)가 담긴 오도송은 현재 천자암 법당의 주련으로 걸려 있다. 通玄一喝萬機伏(통현일할만기복) 진리 통달한 한번의 할에 온갖 번뇌망상 굴복하니 言前大機傳法輪(언전대기전법륜) 말 이전의 한 소식이 법륜을 전하도다 法界長月一掌明(법계장월일장명) 법계를 비추는 달 한 손바닥에 밝았으니 萬古光明長不滅(만고광명장불멸) 만고의 광명은 다함이 없네 스님은 흔히 선을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 사는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대우주 자연 생명의 이치를 바로보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곧 선의 요체라는 것이다. 스님은 또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속마음이 돌처럼 움직이지 않고 단단하면 나머지는 시간이, 시절 인연이 다 해결해준다”면서 “사람들이 나와 상대로 만나는 것 같지만 한 생명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모든 생명이 곧 한 생명으로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나와 상대라는 분별이 없어지면 뭇생명에 함부로 하지 못하고 내 생명만을 위한 월권 또한 할 이유가 없어. 생명은 크든 작든 그 존재가 끝없이 빛나는 거야. 내가 밝으면 상대가 밝고, 모든 생명이 밝은 거야. 이런 인과의 도리를 알고 마음을 밝게 드러내면 세상에서 얼키고 설킨 인연끼리 두루 선업을 짓게 돼 있어.” 어느새 천자암에 산음(山陰)이 드리웠다. ‘눈 밝은’(활안) 노승이 올려다보는 곱향나무 상록 잎새가 가벼운 바람에 살짝 흔들린다. 향나무 아래 수곽(水廓)에서 떠 마시는 물맛에도 청향(淸香)이 감돈다. 〈김석종 sjkim@kyunghyang.com〉 ◇ 활안스님 1926년 담양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강규성. 45년 순창 순평사로 출가해 5년 동안 행자생활을 했다. 종단이 혼란스러울 때여서 53년 덕숭산 수덕사에서 월산스님을 은사로 뒤늦게 사미계를 받았다. 58년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상원사 청량선원과 지리산 칠불암·범어사·용화사 등의 선원에서 40안거를 성만했다. |
[염화실의 향기]제자 심우스님이 본 활안스님 | ||
입력: 2007년 02월 23일 15:02:56 | ||
“천자암 생활은 한 마디로 정진과 울력의 연속으로 그대로가 수행이었습니다. 스님은 승속을 떠나 게으른 것을 한치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백제불교회관의 김석종 기자의 취재내용을 실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