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곁에 함께하는 석학-조원호 전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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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8.09.23 조회15,828회 댓글0건본문
● 우리곁에 함께하는 석학 - 조원호 전회장님
아마도 조원호님(법명,덕행)의 직함 중에 가장 많이 불리는 것은 교수님(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교수, 석좌교수)과 회장님(불광사의 제5대회장: 2004~2006년)일 것이다. 대부분의 직함이 그러하듯이 이 두 직함도 막중한 책임감을 예감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역할을 맡은 곳이, 서울에서 아니 한국에서 중추적인 도심사찰의 역할을 하는 불광사와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대학이니 짐작이 간다.
매미가 울어대는 쨍쨍한 여름방학, 관악산이 보이는 서울대 캠퍼스 재료공학부 연구실을 찾아갔다. 연구실에서 만난 그의 환한 미소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완벽하게 정돈된 연구실, 전공 책들 사이에 꽂혀있는 광덕스님의 법어집과 어머님의 사진과 가족사진이 눈에 띄었다. 간혹 울려대는 전화벨소리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고 잔잔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마치 조용한 암자에서 스님과 한담을 나눈듯한 분위기였다.
불광의 어떤 이가 귀띔했었다. 덕행거사님이 청소년기에 어느 스님의 꿈에 나타났는데 승복을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라고 스님은 거사님의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언뜻 그가 춤을 추던 마당의 목록에 한국의 이공학계가 있고 불광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해몽을 확장시켜 보았다.
-여름휴가는 다녀오셨나요?
"아내(정영희님, 법명은 자인성, 전 위덕대 영문과 교수)와 같이 통도사에서 주관하는 3박4일간의 참선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으로 휴가를 대신했다. 12년 전 참선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통증삼매로부터 시작한 것 같다. 은퇴 후엔 본격적으로 참선수행에 매진하고 싶다.
-불광과의 첫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1991년 65세였던 어머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40대 초반이었는데 항상 마음의 지주가 되었던 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너무 컸다. 매일 저녁 술을 마시고 울다가 잠이 들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보다 못해 당시 살던 곳(잠실 우성아파트)에 가까이 있던 불광사에 같이 가기를 청하였다.”쓸 데 없는 소리 마라...“라는 말이 거의 나올 뻔했는데 생전에 며느리가 참된 불자가 되기를 소원하던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때 들었던 마하보디합창단의 음성공양에 눈물이 날 정도로 환희심이 들었다. 그 후 정말 열심히 법문 듣고, 철야정진에도 빠지지 않았고 절수행과 염불수행과 기도를 통해 행복한 신행생활을 했다. 나보다 먼저 불광사에서 여러 교육을 받고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 회장직을 맡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당시의 계획으로는 회갑이 지난 후에 봉사와 종교 활동을 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아내의 감언이설과 협박에 못 이겨 5년을 앞당겨 중책을 맡게 되었다(웃음). 아마 불광의 전환기였던 당시, 나의 힘이 불광에 도움이 되리라고 아내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법당의 어디에 앉아 있어도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웠던 익명의 시절이 신앙생활면에 볼 때는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어머님을 많이 닮으신 것 같은데 어머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김해에 있는 ‘은하사’에 열심히 다니시는 독실한 불교 신자셨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새벽 4시에 일어나 금강경을 봉독하고 기도를 하실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인지 내가 108배를 매일한 것이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해외출장을 가더라도 호텔방에서 했고, 어쩌다 하루 빠트리면 그 다음날 216배를 한다. 일타스님의 ‘기도’라는 책이 온 가족의 애독서여서 책의 표지가 다 해질 정도이다. 기도는 불자의 특권이다. 기도는 진리의 힘을 움직이는 것이므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진리에 기초한 소망을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아이들에게 ”네가 사회와 인류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려면 네가 먼저 훌륭하게 되어야 한다. 남에게 유익한 것을 주려거든 그게 무엇이건 네가 먼저 쌓아야한다. 그건 기도와 소망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얘기하곤 했다. 집에서 기도하는 부모를 보고 자란 영향인지 아이들도 고등학교 다닐 때 매일 108배를 했었다.”
장남 재현군은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차녀 현화양은 미국 UC버클리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있다.
-인생에서 위기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인생에서 위기란 자기가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위기일수도 있고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 약 30 여년 전 미국에서 유학생활 할 때이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지도교수로부터 연구 주제를 받았는데, 그것은 어떤 미국학생이 도저히 해결하지 못하고 포기한 주제였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해 보았으나 도저히 결과가 나오지 않아 불철주야 연구에 매진하였다. 심지어 잠을 자거나 꿈에서도 실험하고 연구하는 꿈을 꿀 정도였다. 아마 간화선에서 화두를 오롯이 궁구하면 몽중일여가 된다는데 그 때가 혹시 그런 상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약 1년이 지나가게 되어도 별다른 성과가 없게 되었고 마음은 더욱더 초조하게 되고 입맛도 떨어지고 건강이 매우 나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학교에 등하교 할 때 내가 탄 지하철이 당시 다니고 있던 원각사(그 때 당시 뉴욕 맨하탄에 위치하고 있는 유일한 한국 사찰)를 지나게 되었는데, 지하철이 원각사를 지날 때 마다 꼭 반야심경을 마음속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독송하였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나마 매일 매일 반야심경을 독송하였고 매주 일요일 일요법회에 참석하여 스님의 훌륭한 법문을 듣고 마음의 위안을 삼으면서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한 결과 어느 날 그렇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일시에 풀리게 되고 지도교수로부터 많은 칭찬과 함께 최 단시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 연구실 사진 설명 :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의 친환경에너지 나노소재 글로벌연구실-"친환경 에너지인 고효율 태양광 전지용 물질의 제조"
-정년 후에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제까지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은퇴 후에는 기도와 수행을 중심에 둔 삶을 살고 싶다. 이제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잠이 오면 잠을 자듯이, 죽음이 다가왔을 때 ‘이제 쉬고 싶다’는 심정으로 고요히 죽음을 맞이하려면 수행이 필요하다. 옷 세벌과 빈 방만 준비하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보살님의 감언이설에 밀려 회장이 되셨다고 농담을 하셨지만 어쩌면 말씀하신 감언이설(甘言利說)이 불광인들에게 부처님의 감로수와 같은 말씀과 인생에 이로운 말씀을 전함을 일컬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장직에 있을 때 법회에서 전한 좋은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난 6월 8일 일요법회의 동영상은 불광 홈페이지의 미디어-동영상에 있고, 2006년의 불광사 창립기념강연 “물질개념과 공”이 불교 TV의 ‘종영 프로그램 다시보기’에 남아있다.
**공감플러스에는 윗글이 길어서 줄여야했습니다. 이것이 오리지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