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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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광사 작성일2009.12.16 조회19,753회 댓글0건본문
산사에서 보낸 편지
올해의 신정도 지나가고 입춘과 함께 올해의 달력 한 장을 넘기며 갑술년 설날 아침을 맞이하고 보니 속절없이 세월만 지나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법우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법우님을 뵌지도 벌써 일년이란 세월이 지난 것 같습니다. 법우님의 고뇌스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때가 엇 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저에게는 요즘 들어 세월이 참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몇 일전 제가 사는 집 뒤편 산언덕에 올랐습니다. 지난해 바쁜 생활 속에 파묻혀 살다가 어느새 봄이 지나가버리고 난 다음에야, 아! 봄이였구나 하고 아쉬워했었지요. 올해
는 입춘이 지나자 바로 산언덕에 올라 미리서 봄을 찾아보았습니다. 아직 계절이 일러 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지만 과거 봄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산언덕 숲 속에 봄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봄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생물들이 추운 겨울의 날들을 극복하고 봄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새 삶을 시작하는 계절이라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삶의 큰 의미를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 몹시 추워야 다음해 농사가 병 없이 잘된다는 말이 있듯이 추운 겨울을 견딘 나무들은 단단하고 야물게 성장합니다. 단단하게 잘 자란 나무라야 외풍에도 잘 견디고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것이지요.
법우님, 중국의 사상가이며 시인인 노신이란 사람은 그의 시에서, “꽁꽁 얼어붙은 겨울 추위가 봄꽃을 한결 아름답게 피우리라.” 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딛고 난 다음에야 무너지지 않는 행복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처님도 기존의 삶의 습성과 허황된 가치관을버리고 아무나 쉽게 실행하기 힘든 출가와 고행을 통해 열반락인 깨달음의 세계에 들지 않았습니까.
법우님, 삶에 대한 장애가 없다면 그 모습은 어떨까요? 아마 그 모습은 콩나물이나 온실의 수초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생활의 장애라고 하는 것은 피해버려야 할 대상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법우님, 제가 사는 방 창문을 열면 건너편 산 능선에 참나무와 소나무가 함께 어울려 자라고 있습니다. 참나무는 지난 가을에 아름답게 단풍으로 물들었다가
겨울로 들어서면서 잎을 훌훌 털어버리고 엄동을 견딜 비장한 모습으로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고난의 길을 헤치고 가려면 간편한 몸차림을 하라는 가르침인것 같습니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단풍 참나무에서는 허황된 욕심을 크게 버리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소나무에게는 극한의 역경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할 것은 끝까지 지키라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버리고 지키기 힘들다는 생각에 내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도 알텐데, 허영을 버리지 못하니까 생활의 중심과 주체성도 지키지 못해 욕망의 노예로서 육신생명만 이어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법우님, 나무는 뿌리가 자란만큼 가지도 자란답니다. 뿌리보다 키가 더 큰 나무는 바람에 넘어지고 말테니까요. 새해에는 법우님의 생활이 삶의 터전 깊숙이 뿌리내려 그 어떤 폭풍에도 넘어지지 않는 나무처럼 튼튼한 삶이되시기를 부처님전에 기도드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1994년 설날 7시불교방송 방송